‘사표’는 사법표솔(師法表率)의 줄인 말로 학식과 덕행이 높아 남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을 일컫는 말로써 귀감(龜鑑)과 같은 뜻이다.
이 말은 사마천(司馬遷) 선생이 사기(史記)의 서문에서 「한 나라에 현상(賢相)과 양장(良將)이 있다면 백성의 ‘사표’로 삼을 수 있다」고 말한데서 비롯되었다.
이 혼탁한 세상에 사표로 모실만한 분들이 사회 각 분야에 상당한 줄 알고 있으나 한국 난계(蘭界)에 있어 사표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을 못한다.
필자가 과문하고 천학비재한 때문인지 모르나 사표가 될 만한 난인이 있는지 알 수 없기에 하는 말이다. 다만 작고하신 분까지 포함한다면 한결 같이 애란의 삶을 살아오시면서 일생을 흠결없이 보낸 故 香坡 金琪容 선생을 들 수 있겠다.
사람이 일생을 보내면서 외길을 걷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더욱이 흠결 없이 보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난이 있었기에 고향을 지킬 수 있었다는 향파 선생, 그가 살았던 삶은 아무도 걷지 않았던 난인의 삶이었기에 오늘의 한국 난계는 그를 사표로 모시고 그 공적을 기리고 있다.
그와 고향을 함께 했다는, 그가 살았던 땅에 살고 있다는 것만 해도 자랑이요 긍지로 느끼는 거제의 애란인들에 있었으랴.
우리 거제 사람들 중에는 향파 선생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마치 공자를 두고 옆집에 사는 중니라는 늙은이로만 아는 이도 있었다기에 하는 말이다.
향파 선생이 우리 난계에 끼친 공적은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애란인의 귀감이 되는 생을 살았음이 제일 큰 공적이라 말할 수 있겠다.
동양란이 동양인의 정신적인 지도이념으로 까지 승화되었음을 일깨워 준 그의 공적을 두고 모르긴 해도 목여청풍(穆如淸風)이라 칭송하고 싶다.
목여청풍은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로 제(齊)나라 충신 윤길보(尹吉甫)의 훌륭한 교육을 칭찬한 것으로 좋은 가르침은 마치 봄바람이 만물을 어루만지며 기르는 것 처럼 세상의 풍속을 순화하면서 온누리를 깨우치게 한다는 뜻이다.
‘애란은 애국에 통한다’고 하신 향파 선생, 어려운 경제 사정 가운데도 힘겹게 난을 구하고 교통이 불편하던 시기에 제주도를 몇 차례나 왕래하여 제주 한란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는가 하면 우리 춘란의 명품을 발굴하여 몇몇 품종은 명명하기도 했다.
난의 재배와 감상에 있어서도 외국것을 모방하는 것이 아닌 주체적인 태도를 정립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서 난분과 식재를 개발하는가 하면 난의 역사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에 그 맥과 뿌리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어 「동양란 재배와 감상」이란 역저를 남기었음은 난사에 길이 기록될 쾌거가 아닐 수 없다.
1998년 후학들이 선생의 위업을 기리는 ‘향파 김기용 선생 애란비’를 향리인 거제에 세웠다.
고현만을 굽어보고 서있는 애란비가 바로 그것이다. 선생을 추모하는 애란인 271명과 32개의 난단체가 참여하여 우리 땅에 세운 최초의 애란비였으니 어찌 자랑스럽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여 선생의 애란정신을 계승하고 그의 업적을 기념하는 일이 한국 난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한다는데 뜻을 같이 하는 거제의 애란인들이 향파기념사업회를 발족키로 했다.
뜻을 모은 사람들은 거제도 난연합회 회원들과 향파선생의 유족들이다.
이달 5일엔 중곡동에 있는 장춘향에서 향파기념사업회 추진위원회 발족식이 있었다. 발족식의 참석자는 난연합회 고문, 주만복, 신현학, 옥문환, 이성보, 김주식, 류진태, 이봉균, 김창민 제씨와 난연합회 임원 김강집, 박종명, 류기훈, 설종렬, 김선홍, 이선봉, 진영수, 이유형, 전재준, 정준기, 김승호, 양석준 씨 등 20명이었다.
이 자리에서 추진위원으로 난연합회 고문 전원이 추대되었다.
거제의 애란인들이 주축이 된 한국 난계에 사표이신 향파 김기용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사업회는 이렇게 하여 작은 걸음을 시작했다.
비록 기념사업회가 태동은 거제에서 시작되었으나 전국의 애란인들이 적극 참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08년 3월 29일은 선생의 애란비를 고현만에 세운지 1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 때쯤이면 향파기념사업회도 결성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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